배우 이정재(40)는 최민식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대학 선후배 관계지만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나랑 작품 하나 해보자"라는 최민식의 단 한 마디는 이정재에게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결정을 코앞에 두고 있던 드라마도 고사하고 간택(?)되다시피 참여한 작품이 '신세계'다. 최초 제안자(?) 최민식은 물론 황정민까지 가세한 '신세계'는 대한민국 최고의 범죄조직 골드문의 1인자 선출에 관계된 세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이정재는 골드문에 잠입한 경찰 자성 역을 맡았다.
↑ 사진=뉴시스
1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재는 "최민식, 황정민과 함께 '쓰리톱'이라더라. 부담 안느낄 사람이 있겠나"라며 캐스팅 당시를 떠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최민식은 경찰 기획수사과장으로 목적 의식만을 갖고 사는 인물로 한 축이 명확했고, 황정민은 골드문의 2인자로 잔인하면서 순박한 인물로 캐릭터가 명백했다. 하지만 그가 맡은 자성은 두 남자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로 그려졌을 뿐 캐릭터를 설명해줄만한 히스토리는 고사하고 지문(地文)조차 없었다.
"서커스로 따지자면 한 명은 불쇼하는 사람(최민식)이고, 또 한 명은 칼 던지기 묘기를 하는 사람(황정민)이죠. 그런데 저는 맨손으로 공연하라고 하는 것과 같았죠. 막막하고 난감하기 이를데 없었어요."
그래서 촬영 전 그는 박훈정 감독에게 매달렸다. 자성 캐릭터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졌지만 돌아온 건 "오히려 모호했으면 좋겠다"는 답 뿐이었다.
촬영이 시작되고 그의 걱정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신세계'는 개인의 묘기를 보여주는 장기자랑이 아니라 '합동 공연'이었던 것이다. 멀티캐스팅의 원조가 된 '도둑들'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두 형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저를 살려주려고 양보하는 게 몸으로 느껴졌어요. 마치 자성이 이 극을 끌어가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목표로 삼고 계신듯 했어요. '도둑들' 때는 많은 배우들이 나오지만 각자의 (촬영)공간에서 따로 놀았거든요. 하지만 '신세계'는 세 배우가 한 사람의 몸뚱이에 달린 머리 팔 다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마음 씀씀이가 모인 덕인지 '신세계'는 세 인물이 그려낸 트라이앵글의 각이 딱딱 들어 맞았다. 뿐만 아니라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미지의 이정재가 '수트발'을 제대로 세우며 스크린에 나타날 때면 그 자체 만으로도 훌륭한 미장센이 됐다.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는 최민식과의 작업에 대한 소감을 묻자 "묵직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묵직함은 기본이고 무척 예리하더라"며 "민식 형은 청양고추가 듬뿍 들어간 강된장 같다"고 했다.
데뷔 20년차 배우 이정재는 "나이 마흔을 넘기며 무척 느긋해졌다"고 했다. 그 여유로움은 말투와 얼굴표정에 그대로 묻어났다.
"20대엔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불안감이 컸어요. 그래서 삼십대에 사업을 병행했는데 그땐 제가 무모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죠. 사업 결과가 좋지 않아 경제적으로 큰 것을 잃고 나니 진짜 중요한 건 인기와 돈이 아니란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마구잡이였든 시켜서 했든 20여 작품을 거치고 보니 이제 연기한다는 것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보고픈 욕망이 생겼어요. 그런 상태를 즐기게 된 지금 저는 무척 행복해요."
이정재는 사극 '관상'으로 올 하반기 관객들과 다시 만날 계획이다. 박미영 기자 mypark@munhwa.com